로마인 이야기 6는 로마의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에 관한 이야기이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되었을 당시 18세였던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인 이야기 5에 나와있던 것처럼 안토니우스와의 대결에서 승리한후 명실공히 로마의 제일인자가 된다. 그러나 그는 카이사르와 같은 제정론자였지만 원로원의 견제를 늘 인식하였고 또한 의부 카이사르가 처참하게 암살되었던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늘 원로원 눈치를 보며 알게 모르게 서서히 제정으로의 변환을 꾀한다.

실로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보다 더 보수적이고 영악한 인간이었을 것이다.

기원전 27년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의원들에게 공화정 체제 복귀를 선언하며 여기에 열광한 원로원 의원들은 그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을 부여한다. 그 후로부터 그는 늘 아우구스투스였으며 사실상 로마 제정체제의 초대황제가 된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계속해서 원로원의원들에게 의견을 물어보는등 사실상의 황제였지만 법적으로는 공화정체제의 우두머리였다.

그는 카이사르와 같이 수없이 많은 법률과 세제를 개편하는등 명실상부한 로마의 평화시대를 구가한다.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벌하였다면 그는 게르마니아를 정벌하려고 하였고, 군사적 재능이 부족한 그에게 그의 오른팔이었던 아그리파가 그를 대신해 군을 통수한다.

아우구스투스는 아내 리비아가 데려온 아들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가 있었으며 이들을 의붓아들로 삼았고, 외동딸 율리아와 아그리파가 결혼하여 낳은 가이우스와 루키우스 두 아들을 양자로 삼는다.

점차 자신의 후계자를 모색하는 시도를 하였지만 그가 더욱 아꼈던 둘째 의붓아들 드루수스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게르마니아를 정벌하여 엘베강으로 진격하지만 낙마사고로 사망하게 된다.

티베리우스도 상당한 군사적 재능을 갖고 있었지만 자신의 처지가 후계자가 되지 못함을 느끼고 로도스 섬으로 은퇴한다.

아그리파도 사망하고 그의 정신적 지주이자 친구인 마이케나스도 사망하여 아우구스투스는 그의 양아들들인 가이우스와 루키우스를 예정집정관으로 삼았으나 에스파니아고 파견된 루키우스는 마르세유에서 병사하고 가이우스는 아르메니아와의 외교교섭에 실패하고 아르메니아에서 도망쳐서 소아시아 남서부에서 병사한다.

결국 아우구스투스는 로도스섬에 은퇴해있던 티베리우스를 후계자로 결정한다.

티베리우스는 이러한 아우구스투스의 뜻을 받을어 다시 게르만 민족의 정벌을 시도하여 마르코마니족에 대한 공략을 개시하다 반란이 일어나자 우후조약을 맺는다.

그후 게르마니아 전선은 게르마니쿠스가 담당하게 되고 게르마니아 중부의 토이토부르크 숲에서 바루스가 이끄는 로마군 3만 5천명이 아르미니우스가 이끄는 게르만 반란군에게 몰살당한다. 이를 계기로 로마은 갈리아 정벌때와는 달리 게르만을 포기하고 철수하게 된다.

현재도 독일국민들은 아르미니우스를 영웅으로 모신다고 한다.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에게 최고사령관을 수여한후 서기 14년 나폴리에 머물다 세상을 뜬다.

이로써 제 2대 황제인 티베리우스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티베리우스~수없이 많은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들을 의식하고 은퇴하고 있다가 본의아니게 이들 후계자들이 모두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제2대 황제가 되는 운명에 처해진다. 역시 인간은 그 운명이란것이 있나보다. 이것 또한 전생의 업연이겠지~그 그릇도, 성품도, 이세상에 나서 일어나는 일들도 전생의 업이 커다란 영향을 발휘하는 것 같다.

내려놓자. 노력은 하되 신경끄고 살자. 그저 악업의 소멸을 위한 행동, 노력만이 유일한 의미인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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