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야누스 황제 (98.1.27~117.8.9)

최초의 속주 출신 황제 ( 스페인 이탈리카 ) 45세. 아버지는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밑에서 전공을 세운 군단장.

20대 초반에 아버지의 영향으로 수석 대대장 임무, 시리아가 첫 임지. 그 이후 라인강 방어군.

사투르니누스 반란이후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 맡기전 집정관 담당. 네르바의 양자로 선택됨. 후계자로 지목됨. 네르바 사후 황제가 된 이후에도 저지 게르마니아 방위체제 완비하느라고 귀국 미룸. 99년 로마 입성, 여러가지 선정 베품.

원로원 의원(600명)은 재산의 1/3을 이탈리아에 투자해ㅑ 함. 빈곤가정의 자녀에게 육영자금을 제공토록 규정.

다키아와 전쟁. 101년 3월 평정, 트라야누스 원기둥에 서술됨.

로마시대 최대의 토목공사 ; 트라야누스 다리.

제 2차 다키아 전쟁, 105년 봄~106년. 역시 트라야누스 원기둥에 서술됨.

다키아왕 데케발루스 사망, 다키아 멸망(현재의 루마니아 지방), 속주로 삼음. 도미티아누스 시대의 굴욕적인 강화 끝냄. 로마제국의 영토가 가장 넓어짐.

사회기반시설 정비에 전력 기울임. 카이사르는 속주동화, 트라야누스는 다키아 주민 이주시킴.

트라야누스 목욕탕, 트라야누스 포룸, 건축가는 아폴로도로스. 트라야누스 시장. 오스티아 항만공사, 아피아가도 복선화, 알칸다라다리, 공공사업 러시.

결혼은 했으나 아이는 없었다.

113년 10울 파르티아 원정 ; 파르티아 수도 크테시폰(바그다드) 함락, 토호들 봉기, 게릴라전.

유대인 반란, 진압됨. 트라야누스 병걸림 (63세), 귀국길에 117년 8월 사망. 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

 

하드리아누스 황제(118.8.9~138.7.10)

41세. 역시 에스파니아 이탈리카 출신. 트라야누스보다 23세 어림.

원로원 아버지, 아버지의 외사촌동생이 트라야누스. 아버지 사망때(하드리아누스 10세때) 트라야누스와 아티아누스를 후견인으로 세움.

20세때 군단에 소속된 장교 ; 도나우강 하류. 트라야누스가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맨처음 먼기 다려 트라야누스에게 전해줌. 자식이 없는 트라야누스와 가장 가까운 친족들중에서 하드리아누스는 유일한 남자.

제 2차 다키아 전쟁에서 군단장. 먼 판노니아 속주 총독. (부다페스트). 집정관, 파르티아 원정, 트라야누스 사망후 황제로 추대됨.

유대인 반란, 브리타이나 반란, 북아프리카 속주 반란, 도나우강 북쪽 사르마티아족 반란 ; 진압.

하드리아누스 암살 시도 계획 들통남. 네명 모두 살해함(아티아누스가)

세금 감면, 체납 세금 면제등 인기 정책 씀.

로마전역 순행. 방위체제 재구축. 잉그랜드~스코틀랜드 사이 하드리아누스 방벽. (1차 순행 ; 제국 서방시찰때)

로마법 집대성, 로마법 대전 편찬. 131년. 베누스(비너스)신전 건립, 아그리파가 지은 판테온(만신전, 모든 신을 모신 신전)이 화제로 거의 소실, 다시 복구.

128년 두번째 순행 떠남 52세, 제국 동방 시찰. 유대교의 할례금지, 미소녀 안티노 늘 동행; 나일강 순방때 안티노 자살.

로마군단 도시 아일리아 예루살렘 근처에 건설.

유대 반란 (131년) ; 브리타니아 속주 총독 세베루스 투입, 13년까지, 예루살렘 함락, 진압.

유대인 강제 이산시킴(디아스포라) ; 예루살렘 거주 금지, 아무곳이나 가라.

귀국후 병, 약해짐, 아일리우스(양자)를 후계자로 삼음.

아일리우스, 군단장 취임했으나 결핵으로 사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점찍음, 16세밖에 안됨. 안토니누스(원로원)를 후계자로. 조건은 마르쿠스 아우레리우스와 루키우스를 양자로 삼으라는 것.

138년 62세로 사망.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138.7.10~161.3.7)

52세.

선제의 업적을 계승, 불편한 것만 조금씩 조정.

인격자. 미남. 진정한 보수주의자. 스코틀랜드 국경 하드리아누스 성벽 북쪽에 안토니누스 성벽세움.

양아들은 안니우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23년간 재위, 75세에 사망.

로마인이 가장 행복했던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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